인터뷰 | 구미정 교수

어떤 이야기는 오래되었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성경 속 룻기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기근과 이주, 상실이라는 어두운 현실에서 시작된 한 여인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무너진 삶 속에서도 우리는 어떻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가?”

2026년 가을, VIEWtiful 인문학은 구미정 교수님과 함께 『룻과 함께 아모르 파티』라는 특별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룻기를 익숙한 교훈집이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상실과 이주, 가난을 통과하며 생명을 피워낸 한 인간의 이야기로 새롭게 읽어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강의를 앞두고 구미정 교수님께 이번 강의에 담긴 생각과 기대를 직접 여쭈어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화성인’ 구미정입니다. 제가 경기도 화성에 자리한 이은교회의 부름을 받아 서식지를 옮기게 되면서 자연스레 ‘화성인’이 되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고도 줄곧 대학에서 강의만 했지 본격적으로 목회할 기회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고백합니다만) 시골교회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읍내에 있는 협성대학교 에이블아트·스포츠학과 객원교수로 출강하면서 발달장애 학생들과 어울려 놉니다. 화성인으로 살며 ‘지구인’을 관찰하는 맛을 새롭게 즐기고 있습니다.

배우 윤여정 선생님이 ‘다작’의 이유로 생계를 꼽듯이 저도 비슷하게 ‘생계형 글쓰기’를 해온 것 같습니다. 시간강사로 떠돌면서 꾸준히 글을 쓸 지면이 있고 글값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게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닙니다. 한데 어느 지면에 글을 쓰든, 제 글들의 일관된 관심사는, 질문자께서 짚어주셨듯, 생태와 여성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향한 관심입니다. 그 가운데 사회적 약자를 향한 관심은 제가 모태로부터 몸담은 기독교의 주요 가르침이
니 기본값이라 치고요. 여성은 제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깨닫게 된(어쩌면 ‘아우팅’ 당한) 정체인데요, 석사학위를 쓸 무렵 ‘지구정상회의’(리우 회의)가 열렸거든요. 여성의 억압 문제에 골몰하던 저에게 자연의 억압에도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지요. 그래서 석사·박사학위 논문을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에 관해 썼습니다. 그 사상의 지향점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같이 살자’가 어떨까 싶어요. 혼자만 잘 살지 말고요. 이미 인류가 기대어 사는 지구는 기후 붕괴로 고통받고 있어요. 지구는 하나뿐인데, 지구인 모두가 한국인처럼 살면 지구가 3.9개나 필요하다니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불의한 노릇이지요.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다 같이 살자’는 마음을 갖는 게 오늘날 필요한 회개가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전쟁과 재난이 일상화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어요. 허무주의와 패배주의가 난무합니다. 저는 룻기를 그런 시대정신에 맞선 투사의 이야기로 읽고 싶었어요. 니체가 말한 ‘초인’(위버멘쉬)은 슈퍼맨이 아닙니다. ‘(경계를) 넘어가는 자’, ‘(한계를) 넘어서는 자’입니다. 저는 룻이야말로 그러한 ‘초인’이며 ‘아모르 파티’의 주인공이라 생각합니다.

‘신은 죽었다’는 말이 니체의 ‘브랜드’로 알려져 있는데, 정작 본인은 억울해할 것 같습니다. 자기보다 앞서 비슷한 말을 한 철학자들이 있으니까요. 니체는 그저 자신이 발 디디고 선 시대의 분위기를 반어적으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신이라는 작업가설’ 없이도 우리가 끝내 인간성을 지켜낼 수 있는가 궁구한 것이지요. 룻기는 이러한 니체의 질문에 응답하는 책이라 봅니다. 이번 강의를 통해 우리도 폐허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 힘과 용기를 얻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읽는 구약성경과 달리, 히브리 성경(타나크)에는 룻기가 잠언 뒤에 붙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잠언은 ‘현숙한 여인’에 대한 찬양으로 끝나는데, ‘현숙한 여인’을 직역하면 ‘힘 있는 여자’입니다. 그러니까 룻기는 잠언 끄트머리(31:10-31)에 시적으로 표현된 ‘힘 있는 여자’ 이야기를 네 장에 걸쳐 풀어낸 실사판(實寫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룻기를 신이 죽은 것 같은 시대에, 말하자면 ‘신의 일식(日蝕)’
현상을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끝내 다시 일어서는 ‘힘 있는 여자’ 이야기로 읽고 싶었습니다.

항간에 ‘초식남’, ‘건어물녀’ 같은 신조어가 떠돌고 있습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사토리(달관) 세대’라 표현하더군요. 연애할 기운조차 없이 매사에 심드렁한 젊은 세대를 가리킵니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 유행어가 된 세상, ‘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가 유일한 소원이 된 세상에서 룻기를 ‘힘 있는 여자’ 이야기로 읽는 일은 매우 도발적인 경험이 될 것입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장소가 시장입니다. 기업이 정부보다 힘이 세고, 대학이 기업에 필요한 인재를 상납하는 취업학교로 전락한 시대, 교회마저 시장논리에 굴복한 오늘날, 니체의 통찰이 예사롭지 않지요. 룻기에도 시장인간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비와 긍휼 대신에 돈을 택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 서사에 동참할 기회를 잃습니다. 니체의 표현에 기대면 시장인간은 ‘말세인’인 셈이지요. 말세인의 대척점에 초인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면, 니체는 ‘너 자신을 넘어서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초극한 사람이 바로 ‘위버멘쉬’(Overman)입니다. 니체는 그런 사람들을 “나의 새롭고 아름다운 종족”이라 불렀습니다. 달리 말하면, 삶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원치 않는 불행과 고난으로 점철되더라도, 그 삶을 끌어안고 사랑하는 사람, 그가 바로 ‘아모르 파티의 인간’입니다.

사노라면 남의 인생이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멀리 있는 숲이 푸르러 보이는 이치겠지요. 남의 인생을 복제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힐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내 숨은 내가 쉬어야지, 남이 대신 쉬어줄 수 없지’ 깨닫는 게 ‘아모르 파티’인 것 같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이 삶을 똑같은 순서로 살아내겠다는 마음가짐에서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것 아닐까요.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16) 고백한 이후로 좀체 ‘하나님’을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다만 힘차게 살아갈 뿐이지요. 자기 삶도 버거운 마당에 남(나오미)까지 보살피면서요.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아몬드 나무에게>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나는 아몬드 나무에게 말했노라.
나에게 하나님에 관해 얘기해다오.
그러자 아몬드 나무가 꽃을 활짝 피웠다.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에 나오는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시구와 공명하지요. 룻은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고백 언어를 삶으로 번역했습니다. 이번 VIEWtiful 인문학 강의를 통해 불안과 공포, 고통과 혼란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신의 일식’을 견디는 희망을 건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