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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 류동규 교수

    인터뷰 | 류동규 교수

    겨울은 깊고도 길었습니다. 광장에 모인 촛불이 얼어붙은 공기를 가르고 타올랐던 그 계절, 우리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신에게 묻고, 또 외쳐야 했습니다. 그렇게 겨울은 지나고 봄은 왔지만, 우리는 여전히 길 위에 있습니다.

    2025년 뷰티풀인문학 두 번째 학기의 첫 문을 열어주실 분은 경북대학교 국문학과의 류동규 교수님입니다. 주제는 「김교신, 한국 기독교의 길을 묻다」입니다.

    김교신, 그는 일제강점기의 억압 속에서도 성서와 삶을 떼어놓지 않으며, 시대를 정직하게 응시했던 인물입니다. 교회 안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자리에서 복음을 살고자 했던 그의 신앙은, 지금도 민족과 시대를 향해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묻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김교신이 남긴 흔적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귀 기울이며, 류동규 교수님과의 일문일답을 시작합니다.

      김교신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21년 VIEW에 방문교수로 와서였습니다. 세계관 기초 강의를 청강하면서 김교신에 관해 다룬 『버리지 마라 생명이다』라는 책을 읽었어요. 그 책도 좋았지만 그보다 김교신의 텍스트를 읽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는데, 마침 뷰 도서실에 『성서조선』 영인본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걸 읽게 된 것이 김교신을 공부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김교신은 1901년에 태어나 1945년 해방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까 철들 무렵부터 평생을 식민지인으로 사셨습니다. 1920년에 일본으로 유학해서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는데 그 무렵 일본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 간조에게서 성서를 배웠습니다.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것이 1927년이었는데 그때 무교회주의 잡지인 『성서조선』을 창간해서 1942년 폐간될 때까지 15년간 158호까지 『성서조선』을 간행했습니다. 교사로, 잡지 편집자로서, 무교회 사상가로서 일생을 살았던 분입니다.

      김교신의 실천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역시 『성서조선』을 간행한 일이었습니다. 김교신이 『성서조선』을 창간하면서 ‘가장 사랑하는 조선에 가장 귀한 선물인 성서를 주고자’ 『성서조선』을 창간한다고 말했습니다. 양정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성서조선』을 매달 간행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밤을 새면서 집필해야 했고, 교정과 우편발송, 서점 배달 등을 모두 혼자서 감당했습니다. 자신의 월급을 헐어서 잡지를 내야 했고, 검열과 언론통제정책으로 인해 폐간의 위기를 수도 없이 겪어야 했습니다. 이 일을 15년간 꾸준히 해낸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성서조선』은 그가 창간할 때 마음에 품었던,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려는 사상을 펼친 잡지로서 한국 기독교가 남긴 큰 자산입니다. 이밖에도 그의 교사로서의 실천, 또 무교회 전도자로서의 실천도 말해야 하겠지만 강의에서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김교신 선생의 따님의 인터뷰를 저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저로서는 김교신의 사상을 교회주의의 입장에서 보는 것은 좋은 관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리어 교회를 상대화한 자리에 설 때 김교신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 은연 중에 교회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를 상대화한다는 건 우리가 속한 교회가 특정한 시대, 특정한 문화 속에 있고, 그런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된 제도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는 뜻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근대의 기독교이고, 미국을 통해 전해진 특수한 복음주의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 서게 되면 김교신이 교회의 본질을 어떻게 말했느냐고 묻는 것보다 김교신이 마주했던 역사적 교회는 어떤 것이었는지, 그 제도교회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고 그 입장에서의 삶과 실천이 가지는 의미와 한계가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현재 한국의 일부 기독교 세력은 특정 정치세력을 거의 종교화하며,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탄핵 반대, 반공 이데올로기, 극단적 민족주의 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김교신의 신앙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지금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그 터가 매우 좁아져 있습니다. 기독교가 아주 위험하고 편향된 집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김교신의 기독교, 김교신의 무교회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넓고 활달한 사상이었습니다. 이걸 한두 마디의 가르침으로 옮기기는 어렵습니다. 강의에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김교신의 무교회의 견지에서 한국 사회와 한국의 기독교회를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지금 어디에 와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다 넓은 관점에서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김교신의 일기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성서조선』에 그는 공적 일기를 기록했습니다. 거기에는 사적인 내용도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일기에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진지한 신앙인의 구도적 삶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감동적인 포인트는 너무 많아 일일이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김교신의 글을 문학의 입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두꺼운 서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제가 강의에서 말씀드리려는 것도 김교신의 삶과 사상을 그 시대의 맥락에 놓고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책을 두 권 준비 중입니다. 하나는 김교신의 공생애에 관한 문학적 전기입니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생각한 것들을 강의 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문학적 전기라고 했는데요. 이런 장르가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김교신의 삶을 이야기하되, 그의 글에 드러난 것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것, 김교신의 행동뿐만 아니라 그 행동을 하게 된 내면의 사정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또 김교신의 텍스트를 읽되 텍스트의 맥락을 세세히 드러내어 읽고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의 연관을 꼼꼼히 따져 읽고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김교신의 일기를 기본 텍스트로 삼아서 김교신의 나날의 삶을 복원하고자 하는 책입니다. 이 책 역시 김교신의 내면의 사정들, 주변에 있는 풍경들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김교신에 관해 공부하려면 박상익 교수의 『지사적 그리스도인, 김교신』(근간)이 가장 좋은 책인데, 아직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곧 출간될 거라고 하니까 조금 기다렸다가 이 책을 읽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강의개요 | 김교신, 한국 기독교의 길을 묻다

      김교신은 1901년생으로, 철들 무렵부터 식민지인으로 살다가 1945년 4월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김교신의 공생애를 1927년부터 1945년까지로 볼 수 있는데, 그는 이 시기의 대부분을 교사로, 『성서조선』 주필로 살았다. 그의 공생애 기간 대부분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긴 전쟁의 와중에 있었으니, 우리 근대사에서도 가장 어둡고 야만적인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야만적인 시대를 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길인지, 어떻게 하면 신앙을 실생활에서 드러낼 수 있는지 깊이 고민했고, 그 답을 성서에서 찾기 위해 성서를 진지하게 연구했다. 예수를 따라 사는 것이 참된 삶이라는 믿음으로, 성서라는 등불 하나 들고 그 시대의 어둠을 비추었던 사람, 그래서 그 빛 주위로 신앙의 동지들 몇 사람 불러모아 서로 기대어 그 어두운 시대를 건너갔던 사람. 지금 한국 기독교는 김교신에게 길을 물어야 할 때다.

      1강 조선산 기독교의 모색 (1920-1927)

      청년 김교신은 1920년 도쿄 유학 중 기독교에 입문했고, 1921년부터 우치무라 간조의 강연회에 참석하면서 무교회 전도자의 길을 준비하게 된다. 1927년 7월 우치무라 강연에 참석하던 여러 동인들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하게 된다. 이 무렵 김교신과 조선인 청년들이 『성서조선』을 창간하면서 꿈꾸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2강 단독으로 서다 (1928-1931)

      1930년 6월 동인제가 폐지되고 김교신이 『성서조선』 편집을 단독으로 맡게 된다. 이 무렵 김교신은 칼라일을 읽으며 이상적 인물을 구상하고 있었고, 성서연구회에서 산상수훈 연구를 강해하면서 조선을 일으켜 세울 윤리학을 모색하고 있었다. 김교신이 성서를 통해 찾고자 한 조선의 살 길은 무엇이었는가?

      3강 신앙과 학문의 합금 (1932-1935)

      1934년 동계성서강습회에서 김교신은 「조선지리」를, 함석헌은 「조선역사」를 강의했다. 이 두 강의는 식민지 사관을 벗어나 섭리의 관점에서 조선 지리와 역사를 논의한 것으로 조선 기독교 50년 역사에 빛나는 성취였다. 김교신은 향후 기독교는 ‘신앙과 학문의 합금’이어야 한다고 했다. 김교신이 말한 ‘신앙과 학문의 합금’은 무엇이었는가?

      4강 소록도로 가리라 (1935-1937)

      1935년 3월 소록도 한센인 문신활에게서 온 편지를 받고 김교신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 일 후 『성서조선』은 소록도에서 온 편지를 다수 수록했고 독자들이 이 편지에 응답함으로써 『성서조선』은 새로운 사명으로 다시 뜨거워졌다. 『성서조선』은 한센인들의 삶과 신앙을 전해주는 통로가 되었다. 소록도 통신은 <성서조선>에 무엇을 남겼는가?

      5강 강대한 괴물 앞에서 (1937-1941)

      1937년 김교신은 무교회가 더 이상 교회를 상대로 싸울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신사참배가 강요되고 있었고, 전쟁의 기운이 점점 더 짙어져 가고 있었다. 중일전쟁 이후 『성서조선』 간행은 더욱 어려워져 결국 1939년 신년호는 황국신민서사를 게재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실로 강대한 괴물’과 마주한 상황이 었다. 김교신은 이 환난의 시기를 어떻게 헤쳐나갔는가?

      6강 부활의 봄을 노래하다 (1942-1945)

      1942년 3월 『성서조선』에 「조와」와 「부활의 봄」이라는 글이 실렸는데 이 글이 빌미가 되어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김교신과 『성서조선』 관련자들은 검거되었다. 만 1년 만에 석방된 후 김교신은 일본질소비료공장 관리계장이 되어 조선인들의 삶을 향상하는 일에 헌신하다 1945년 4월 서거했다. 삶의 마지막 시기에 김교신을 이끌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1. 인터뷰 | 채예진 선생

      인터뷰 | 채예진 선생

      “20세기 전쟁과 관련된 영화들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입체적이고 구조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 놓치지 말고 함께해요!!!” 미처 등록하지 못한 <Viewtiful 인문학> 예비 수강생들에게 외치는 채예진 선생님의 초청 인사입니다.

      우리는 매일 평화를 갈구하지만 일상은 그저 총성없는 전쟁인 것만 같은 이때, <Viewtiful 인문학>에서는 1학기 두 번째 강좌로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탐구해보려고 합니다.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에서 박사연구를 하고 있는 ‘채예진’ 선생님이 바톤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2025년 4월 중순, 강의 시작을 앞두고 여러 가지 궁금한 것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채예진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강원도 고성에서 보냈고, 고등학교 시절을 경상남도 거창 기숙사학교에서 보냈습니다. 대학 때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지금은 주로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보냈던 어린시절은 제 정서와 감성이 마음껏 자랄 수 있었던 때로 기억합니다. 설악산 자락과 동해바다에서 뛰놀면서 읽고 싶었던 책을 실컷 읽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시골에서 살다보니 문화생활을 하기 어렵다는 점이 늘 아쉽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 학교에서 새로 배운 내용이 있으면 직접 가서 보고 싶은 욕구가 컸는데, 시골 바닷가 마을에서 목회를 하셨던 부모님께서 방학때마다 가보고 싶었던 역사 유적지나 박물관, 미술관, 음악회에 갈 수 있도록 애써주셨던 것이 기억에 많이 납니다. 지금도 직접 가서 보고 느끼며 다양한 세상을 경험하고 만나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제 연구의 초점은 학령기를 거쳐 성인이 된 학습자들이 역사를 어떻게 배우고 또 교육할 것인가에 대한 주제입니다. 다양한 매체와 플랫폼이 만들어지면서, 여러가지 역사 컨텐츠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학생들만큼이나 성인들의 역사학습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에 대한 인식과 판단이 현재의 선택에도 영향을 준다는 점을 관찰하면서 성인들에게는 어떤 역사교육과 학습이 필요할까, 라는 질문을 해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최근에는 성인학습자로서 역사교사의 평생학습에 관심을 갖고 공부해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2017년을 전후로 가나안 성도가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가나안 성도라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에 대해서도 때때로 고민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어린시절 강원도 고성에서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셨던 부모님을 보면서 제가 배운 것과 가지고 있는 것들을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전 세계의 성인 학습자들이 한국사를 넘어 세계사 속에서 영화를 통해 근현대 역사를 이해하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획에 동참하고 싶었습니다.

      역사 공부는 제가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탐색하고, 또 제가 서있는 위치의 좌표를 가늠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언젠가 듣게된 어른들의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고, 그 말을 했던 상황속에서 어떤 의미였는지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의 즐거움에 매료된 것 같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해를 완성했다기 보다는 이해해나가는 과정에 대한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주로 오늘날과 밀접하게 관련된 근현대 시기의 한국사, 세계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학부에서는 국사학과 국제관계학을 공부했고, 석사과정에서는 동아시아사 전공으로 대만과 미국의 관계를 풀브라이트 학술교류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문화냉전 차원에서 그 의미를 검토했습니다.

      학부와 석사과정을 거치면서 국사학과 공부만큼이나 ‘국제관계학과’ 강의를 열심히 들으면서 20세기의 국제관계, 질서변화, 외교정책 등을 다룬 책과 영화, 그리고 수업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뉴스에서 어떤 위기상황, 문제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위기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렇다면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은 언제, 왜,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났던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며 생각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전히 분단국가인 한국의 상황이 저희 가족들의 삶, 가치관, 선택과 결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황해도가 고향이셨으나 6.25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실향민이 되신 외할아버지의 삶을 생각하면서 20세기 전쟁사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습니다. 시골에서 학원을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늘 방과후에는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대학에 가서 본격적으로 세계사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때 저는 세계의 세계사 관련 영화들을 100여편 정도 모아서 보고 분석하면서 세계사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서울대학교 스누콤센터와 고등학교 등에서 근현대 세계사에 대한 특강 요청이 와서 학생들의 흥미와 역사적 이해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영화를 활용하여 20세기 전쟁사 수업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나 영상물은 어디까지나 실화를 모티브로 하지만, 재미를 위해 각색을 거친 작품입니다. 인물과 사건 등은 작가와 감독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창조되었으므로 영화작품을 몰입해서 ‘감상’할 수는 있지만, 무엇보다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 영화의 ‘메시지’가 무엇일지 생각해본다면, 당시 상황과 역사적 맥락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고민해볼 수 있는 훌륭한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6.25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 다룹니다. 20세기 전쟁들의 전후 맥락을 이해하면서 세계 질서의 변화, 그리고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역학 관계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를 고려할 때, 영화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쉰들러리스트>, <피아니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 <마지막 황제>, <진링의 13 소녀>를 추천합니다. 책은 김용구 선생님의 <세계 외교사>, 그리고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함께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추천합니다.  

      추천책

      전쟁은 생명을 무가치하게 짓밟는 잔혹한 상황을 국가의 이익을 위해, 우위를 점하기위해 정당화합니다. 생명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나의 존엄과 가치를 지킬뿐만 아니라 특정 세력의 이익과 목적에 생명의 가치가 수단화되는 것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역사 공부는 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세상의 구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생명으로서의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선택’하는 과정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상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역사 공부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이라는 주제가 다소 무거울 수 있지만, 저와 수강생 여러분들의 지난 100년간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더 깊게 알아가고 깨닫고 성찰하는 과정에 몰입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절반 이상은 한반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벌어진 전쟁 역사를 다루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한 사람들에게 20세기의 전쟁들이 미친 영향과 현재의 삶에도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20세기 전쟁과 21세기 오늘날의 우리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에 초대합니다.

      전쟁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삶과 세계 질서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입니다. 이번 강좌에서는 20세기의 주요 전쟁을 다룬 영화들을 통해 전쟁의 역사적 맥락을 탐구하고, 나에게 전쟁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그 의미를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전쟁이 어떻게 기억되고 재현되는지를 분석하면서, 전쟁이 개인과 사회에 남긴 흔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함께 고민할 것입니다.


      강의 1. 전쟁과 나: ‘나에게 전쟁이란?’

      전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과 영화 속 전쟁 재현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나에게 전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는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전쟁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는가, 특정한 서사를 만들어내는가? 20세기의 전쟁이 21세기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바탕으로 영화라는 매체가 전쟁의 경험과 기억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검토하고, 이후 강의에서 다룰 전쟁 영화와의 연결고리를 만들어갑니다.

      강의 2. 제1차 세계대전: <1917>(2019)과 현대전의 시작

      제1차 세계대전은 산업화된 대량 살상의 시작이었으며, 전쟁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영화 <1917>은 참호전과 병사 개개인의 경험을 생생하게 재현하며, 전쟁의 극한적인 모습을 담아냅니다. 본 강의에서는 전쟁이 한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과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정당화되었는지를 탐구합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00년이 넘은 오늘날, 우리는 이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며, 그 기억이 현대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논의합니다.

      ✦ 질문: “1917” 속 병사들의 경험을 오늘날의 우리와 연결할 수 있을까? 현대의 전쟁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 경험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강의 3. 제2차 세계대전: <인생은 아름다워>(1997)와 전쟁의 인간성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 질서를 완전히 뒤바꾼 전쟁이었으며, 특히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은 인간성의 극단적 파괴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전쟁과 학살의 현실 속에서도 인간성이 유지될 수 있는가를 묻는 영화입니다. 본 강의에서는 전쟁이 인간성에 미치는 영향, 폭력과 사랑이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해 탐구합니다. 또한 전쟁의 기억이 후세대에게 어떻게 전승되며, 우리는 그 기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논의합니다.

      ✦ 질문: “인생은 아름다워” 속 아버지의 선택은 전쟁 속에서도 인간성이 지켜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가? 반대로, 전쟁은 인간성을 얼마나 쉽게 무너뜨리는가?

      강의 4. 한국전쟁: <국제시장>(2014)과 전쟁의 여파

      한국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입니다. 영화 *”국제시장”*은 전쟁이 한 가족과 개인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를 보여주며, 한국전쟁의 기억이 경제 발전과 이산가족 문제, 그리고 분단 현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탐색합니다. 본 강의에서는 한국전쟁이 남긴 사회적·정치적 영향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가 이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논의합니다.

      ✦ 질문: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 한국전쟁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한국전쟁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강의 5. 베트남전쟁: <포레스트 검프>(1994)와 전쟁의 후유증

      베트남전쟁은 미국 내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전쟁 중 하나로, 참전 용사들의 트라우마와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포레스트 검프”*는 전쟁의 전투 자체보다는 전쟁 이후 개인과 사회가 겪는 변화를 조명합니다. 본 강의에서는 베트남전쟁이 참전 군인들에게 남긴 정신적·사회적 상처를 탐구하고, 전쟁을 둘러싼 정치적·도덕적 논쟁을 분석합니다.

      ✦ 질문: 전쟁은 단순히 총과 폭탄이 오가는 순간에만 존재하는가, 아니면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개인과 사회에 깊이 새겨지는가? 전쟁 이후의 삶에서 우리는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고 치유해야 하는가?

      강의 6. 전쟁의 기억과 나: ‘나에게 전쟁이란?’을 다시 묻다 

      이번 강의를 통해 우리는 20세기의 주요 전쟁이 21세기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탐구했습니다. 이제 다시 ‘나에게 전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차례입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 전쟁의 기억은 어떻게 전달되는가? 전쟁을 다룬 영화는 우리에게 전쟁을 어떻게 인식하도록 만드는가? 또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전쟁(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등)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본 강의에서는 전쟁의 기억이 어떻게 현대 사회에서 활용되거나 왜곡되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전쟁의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 현재와 미래를 위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논의합니다.

      ✦ 질문: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세계에서, 우리는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기억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평화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봄날은 오고 새싹은 움틉니다. 영화와 전쟁의 조합이 기대되는 4월의 봄날, 1학기 2번째 과목, 전쟁사 강좌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 인터뷰 | 박흥식 교수

      인터뷰 | 박흥식 교수

      혹독한 겨울을 보내며 우리의 고민과 자성은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루 하루가 역사에 남을 뉴스들로 채워지고 있는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VIEWtiful 인문학>은 한국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의 지적근력을 키워나가는 작은 배움터이자 연대의 끈이 되고자 합니다.

      저는 현재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주전공 분야는 ‘중세 말기 유럽 도시사’이고, 중세 유럽의 사회경제사, 일상생활사, 교회사, 흑사병의 영향 등에 대한 다수의 연구논문을 집필하였습니다. 교회사에 대해 관심이 많아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21세기북스, 2017) 책을 집필하였고,  24년도에는 중세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조망한 『중세와 그리스도교』(홍성사, 2024)를 썼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한국교회를 위해 교회와 세상을 잇는 플랫폼을 하나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약 1년 반 전에 서울대학교에서 최종원 교수님, 전성민 원장님, 우종학 교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함께 했던 분들과 제 생각을 나누면서 최종원 교수님께 기획을 좀 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뷰티플 인문학은 그와 같은 만남과 구상들이 축적되어 탄생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인문학, 과학, 역사학, 신학 등 다양한 학문이 건강한 교회와 사회를 만드는데 협력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교황제도는 고대에 기원하여 현재까지 존속하는 매우 예외적인 제도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한 것은 중세시대였습니다. 이 제도가 정착하고 여러 역할을 수행하기까지는 기독교의 발전이라는 종교적 측면이 전제되지만, 그와 동시에 교황이 유럽 역사의 전개에서 차지해 왔던 고유한 역량 및 지도력에도 기인하였습니다. 세계사의 전개에서, 교황에게 종교적 역할과 더불어 정치적 성격이 특히 두드러지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처음부터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톨릭의 다양한 성격과 특징들은 개신교의 발전에도 여러 형태로 영향을 끼쳤고, 모델로도 작용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교황권의 역사는 가톨릭은 물론 개신교의 토대를 이해하고 성찰하는데 도움”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기독교가 역사적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변하지 않는 본질을 지니고 있지만, 많은 요소들은 역사적 과정에서 새로운 필요에 의해 채택되었고, 내외적 요인들에 의해 구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변화가 무엇이었는지, 교황제도와 교회에 어떤 새로운 요소들이 가미되었는지, 이것이 기독교 정신 및 본질을 훼손하지는 않았는지, 검토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교황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현재에도 세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교황의 발언 하나, 행적 하나가 전세계에 실시간으로 뉴스가 되어 전파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교황사에 대한 책이 수없이 많지만 학문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또 많이 읽히는 책들이 개신교 학자들에 의해 집필되었습니다. 반면 가톨릭 연구자들이 교황사 연구와 서술에 오히려 주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사실도 흥미롭습니다. 교황은 종교사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어떤 입장에 있으시든지 들어 두시면 교황과 바틴칸을 이해하는데 다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너무 큰 기대를 하시면 실망하실 것 같습니다만…^^)

      저는 교황이 종교지도자로서 훌륭한 역할을 해 왔지만, 종종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제어하지 못했고, 또 폐쇄적인 조직 문화에서 중요한 문제를 독단적으로 결정함으로써 과오를 범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교황이 고독하게 결단해야 할 부분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그런 실수들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노출시키고 성찰하는 것이 역사학이 해야할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종교개혁시기 당시에 복음주의 지도자들도 “마치 교황같다”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개신교 목사들이 “개교회 내에서 마치 교황 같은 지위를 갖고 있다”고 비판받아 왔습니다. 한국교회가 계엄 이후의 정국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길게 설명드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일부 목회자들이 정치적으로 균형을 잃은 태도를 보이는 데에 그치지 않고, 교인들을 내세워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추구하고 있어서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대해 이해가 낮은 일부 목회자가 전횡을 일삼아 공동체를 위기로 내몰고 있습니다. 교회의 개혁과 개선이 시급합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제자리를 찾는 성숙한 교회공동체가 절실합니다.

      반면, 현재 종교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도자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황은 교회를 개혁하고, 세상의 불의를 비판하고, 약자를 끌어안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환경과 기후변화 등 인류 보편의 문제에 대해서도 침묵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500년만에 이런 역전현상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개신교는 성찰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중학교 때 펄벅의 『대지』라는 소설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그 때 갖게 된 인간에 대한 관심에 끌려 결국 역사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역사학 연구의 주요 대상이 다양한 인간들 및 주제들이고, 필요에 따라 연구의 이슈를 늘 새롭게 설정해 예기치 않은 성과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역사학자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큰 보람과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오래 전 한 청년이 제게 자신이 『성경』을 읽을만한 동기를 제시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구약성경의 경우 최소 2000년 전에 쓰여졌지만,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들의 본질에 대해 그토록 깊게 간파하고 있는 점이 놀랍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오래 전에 쓰여진 성경이 인간에 대해 그토록 깊은 통찰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라고 즉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고, “세상이 어떻게 오늘과 같은 모습이 되었는지 이해하고 싶으시다면, 다양한 종류의 역사책들이 큰 도움”이 되리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책은 강의 주제와는 좀 거리가 있지만… 물으시니 간략히 소개해 보겠습니다.

      근래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역사학에서도 기후가 초래한 영향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기후가 전염병과 사회변화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기존에도 일부 연구가 있었으나, 영국의 경제사학자 브루스 M. S. 캠벨(Bruce M. S. Campbell)이 2016년 저술한 『대전환. 중세 말 세계의 기후, 질병, 그리고 사회 The Great Transition. Climate, Disease and Society in the Late-Medieval World』는 시의성은 물론이고, 주제, 학술적 깊이, 그리고 학제간 연구의 성과라는 점에서 주변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만한 문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기후 변화가 팬데믹의 발병과 인간 사회 및 경제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 13세기 말에서 15세기 사이 시기를 방대한 자료를 동원해 치밀하게 연구했습니다.

      이 책에는 제가 연구하고 있는 흑사병에 대해서도 최신 성과가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자연과학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이 많아 연세대학에서 대기학을 가르치시던 노의근 교수님과 공동으로 번역했습니다. 힘이 많이 들었지만 공부도 많이 되었습니다. 이제 역사가들은 자연의 변화, 과학의 연구성과에 대해서도 좀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역사서술에 반영해야 되리라 생각합니다.

      교황사에 대한 국내 저서 중 제가 읽어본 좋은 책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대신 서양서 몇몇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데, 강의를 들으며 함께 읽을 좋은 책은 교황사 연구자 푸어만의 책입니다. 그리고 제가 2024년에 집필한 『중세와 그리스도교』에도 교황에 대한 내용을 책 곳곳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두 책의 내용이 강의의 뼈대를 이루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호르스트 푸어만, 『교황의 역사. 베드로부터 베네딕토 16세까지』 차용구 역(길, 2013)

      박흥식, 『중세와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 세계의 안과 밖』(홍성사, 2024)

      저는 이번 강의에서 기독교가 지나온 과거를 교황 중심의 제도교회를 통해 성찰하고,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회란 무엇이었나? 당대 사회의 문제에 교황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등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볼 것입니다.


      강의1. 로마제국과 교황

      밀라노 칙령을 전후로 기독교는 질적인 변화를 하게 되고 교황의 위상도 변모했다. 로마제국과 교황이 상호작용하며 위기를 극복하려 노력하는 가운데 기독교에는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는가? 

      강의2. 프랑크 왕국과 교회

      게르만 왕국의 개종, 교황의 잉글랜드 선교 시도, 그리고 카롤링가와의 연대는 교회가 당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서유럽 지역에서 얻은 크고 작은 성과가 교황 중심 체제로의 변화를 모색하는 토대가 되었음을 규명하게 될 것이다.

      강의3. 개혁교황과 황제

      서유럽에서 수도원 개혁운동은 개혁 교황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개혁적인 움직임이 대규모 수도회의 등장과 서임권 갈등이라는 교황권 강화를 위한 싸움으로 귀결된다. 반면, 정작 기독교적 사회로의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한 이유를 찾아보게 될 것이다. 

      강의4. 절정기의 교황

      교황권이 절정기에 가까이 가던 11세기 말 교황과 가톨릭 세계는 왜 동방으로 십자군 원정을 떠났던 것일까? 200년에 걸친 원정이 한시적으로 교황권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는 기여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절정기의 교황들은 당대에 정작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강의5. 교회의 위기? 교황권의 위기?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종결된 후 교황권은 큰 위기를 맞는다. 교황이 로마를 버리고 아비뇽에 머물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가까스로 로마로 귀환하지만 그 후에는 ‘르네상스 교황’이라는 모호한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 무렵 교황은 어떤 목표를 갖고 있던 것일까?

      강의6. 교황과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에 결정적인 위기였다. 반면 개혁세력은 정의의 세력으로 표현됩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지나칠 정도로 루터, 나아가 종교개혁가들의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다. 교황의 관점에서 종교개혁을 재해석한다면 어떤 점이 달리 보일까요? 그리고 교황청은 개혁가들의 비판에 맞서 어떤 변화를 선택하게 되었나?


      다소 거칠게 표현했지만, 이 강의에서는 로마제국기에서 종교개혁기까지 교황과 교황권에 대해 다양한 질문들을 던지며 기독교의 역사에 대한 우리들의 사고와 이해를 확장시켜 보고자 합니다.

      여전히 찬바람이 불더라도 반드시 오고야마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3월에 뵙겠습니다.

      지면으로나마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