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은 깊고도 길었습니다. 광장에 모인 촛불이 얼어붙은 공기를 가르고 타올랐던 그 계절, 우리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신에게 묻고, 또 외쳐야 했습니다. 그렇게 겨울은 지나고 봄은 왔지만, 우리는 여전히 길 위에 있습니다.
2025년 뷰티풀인문학 두 번째 학기의 첫 문을 열어주실 분은 경북대학교 국문학과의 류동규 교수님입니다. 주제는 「김교신, 한국 기독교의 길을 묻다」입니다.
김교신, 그는 일제강점기의 억압 속에서도 성서와 삶을 떼어놓지 않으며, 시대를 정직하게 응시했던 인물입니다. 교회 안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자리에서 복음을 살고자 했던 그의 신앙은, 지금도 민족과 시대를 향해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묻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김교신이 남긴 흔적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귀 기울이며, 류동규 교수님과의 일문일답을 시작합니다.
Q. 안녕하세요, 교수님. 국문학을 전공하신 입장에서 김교신이라는 인물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되신 계기나 어떤 특별한 동기가 있으셨을까요?
김교신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21년 VIEW에 방문교수로 와서였습니다. 세계관 기초 강의를 청강하면서 김교신에 관해 다룬 『버리지 마라 생명이다』라는 책을 읽었어요. 그 책도 좋았지만 그보다 김교신의 텍스트를 읽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는데, 마침 뷰 도서실에 『성서조선』 영인본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걸 읽게 된 것이 김교신을 공부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Q. 김교신 선생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짧게 그의 생애와 사상을 간단히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김교신은 1901년에 태어나 1945년 해방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까 철들 무렵부터 평생을 식민지인으로 사셨습니다. 1920년에 일본으로 유학해서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는데 그 무렵 일본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 간조에게서 성서를 배웠습니다.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것이 1927년이었는데 그때 무교회주의 잡지인 『성서조선』을 창간해서 1942년 폐간될 때까지 15년간 158호까지 『성서조선』을 간행했습니다. 교사로, 잡지 편집자로서, 무교회 사상가로서 일생을 살았던 분입니다.
Q. 김교신 선생의 신앙은 흔히 ‘성서적’이면서 동시에 ‘민족적’이라고 이야기되는데요, 이런 면모가 일제강점기를 살아야 했던 그의 삶이나 실천 속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성서조선』 창간과 관련해서)

김교신의 실천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역시 『성서조선』을 간행한 일이었습니다. 김교신이 『성서조선』을 창간하면서 ‘가장 사랑하는 조선에 가장 귀한 선물인 성서를 주고자’ 『성서조선』을 창간한다고 말했습니다. 양정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성서조선』을 매달 간행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밤을 새면서 집필해야 했고, 교정과 우편발송, 서점 배달 등을 모두 혼자서 감당했습니다. 자신의 월급을 헐어서 잡지를 내야 했고, 검열과 언론통제정책으로 인해 폐간의 위기를 수도 없이 겪어야 했습니다. 이 일을 15년간 꾸준히 해낸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성서조선』은 그가 창간할 때 마음에 품었던,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려는 사상을 펼친 잡지로서 한국 기독교가 남긴 큰 자산입니다. 이밖에도 그의 교사로서의 실천, 또 무교회 전도자로서의 실천도 말해야 하겠지만 강의에서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Q. ‘성서조선’를 외쳤던 김교신의 신앙은 당시 주류 교회와 어떤 점에서 달랐는지 궁금합니다. 또 그가 흔히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교회에 대한 참된 사상을 이해한다면 ‘참교회주의’라고 해명하는 김교신의 따님의 인터뷰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교수님께서 설명해 주신다면 김교신의 교회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김교신 선생의 따님의 인터뷰를 저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저로서는 김교신의 사상을 교회주의의 입장에서 보는 것은 좋은 관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리어 교회를 상대화한 자리에 설 때 김교신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 은연 중에 교회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를 상대화한다는 건 우리가 속한 교회가 특정한 시대, 특정한 문화 속에 있고, 그런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된 제도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는 뜻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근대의 기독교이고, 미국을 통해 전해진 특수한 복음주의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 서게 되면 김교신이 교회의 본질을 어떻게 말했느냐고 묻는 것보다 김교신이 마주했던 역사적 교회는 어떤 것이었는지, 그 제도교회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고 그 입장에서의 삶과 실천이 가지는 의미와 한계가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Q. 이번 강의의 주제에서도 알 수 있듯, 교수님께서는 김교신 선생에 대한 연구를 통해 오늘날 한국 기독교를 성찰하거나 돌아보는 계기를 가지신 듯합니다. 그렇다면 김교신의 신앙과 삶은 지금의 한국교회에 어떤 메시지를 던져준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현재 한국의 일부 기독교 세력은 특정 정치세력을 거의 종교화하며,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탄핵 반대, 반공 이데올로기, 극단적 민족주의 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김교신의 신앙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지금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그 터가 매우 좁아져 있습니다. 기독교가 아주 위험하고 편향된 집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김교신의 기독교, 김교신의 무교회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넓고 활달한 사상이었습니다. 이걸 한두 마디의 가르침으로 옮기기는 어렵습니다. 강의에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김교신의 무교회의 견지에서 한국 사회와 한국의 기독교회를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지금 어디에 와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다 넓은 관점에서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Q. 김교신의 일기나 글에서 드러나는 ‘실천하는 신앙’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김교신의 글이나 삶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을 받았던 부분이 있다면 소개해주시고, 이유도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슴을 울렸던 그의 글)
김교신의 일기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성서조선』에 그는 공적 일기를 기록했습니다. 거기에는 사적인 내용도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일기에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진지한 신앙인의 구도적 삶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감동적인 포인트는 너무 많아 일일이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Q. 국문학자로서 바라본 김교신의 글에는 어떤 문학적 특징이나 미학이 드러나나요? 그의 문장은 단순한 신앙 고백을 넘어 어떤 서사나 정서를 품고 있다고 보시나요?
김교신의 글을 문학의 입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두꺼운 서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제가 강의에서 말씀드리려는 것도 김교신의 삶과 사상을 그 시대의 맥락에 놓고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Q. 마지막으로 교수님께서 현재 김교신과 관련하여 책을 집필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출간 예정중인 책에 대해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책에는 김교신의 어떤 모습이 가장 부각되나요? 그리고 독자들이 꼭 주목해주었으면 하는 부분은 어떤 점인가요?
책을 두 권 준비 중입니다. 하나는 김교신의 공생애에 관한 문학적 전기입니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생각한 것들을 강의 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문학적 전기라고 했는데요. 이런 장르가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김교신의 삶을 이야기하되, 그의 글에 드러난 것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것, 김교신의 행동뿐만 아니라 그 행동을 하게 된 내면의 사정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또 김교신의 텍스트를 읽되 텍스트의 맥락을 세세히 드러내어 읽고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의 연관을 꼼꼼히 따져 읽고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김교신의 일기를 기본 텍스트로 삼아서 김교신의 나날의 삶을 복원하고자 하는 책입니다. 이 책 역시 김교신의 내면의 사정들, 주변에 있는 풍경들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김교신에 관해 공부하려면 박상익 교수의 『지사적 그리스도인, 김교신』(근간)이 가장 좋은 책인데, 아직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곧 출간될 거라고 하니까 조금 기다렸다가 이 책을 읽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강의개요 | 김교신, 한국 기독교의 길을 묻다
김교신은 1901년생으로, 철들 무렵부터 식민지인으로 살다가 1945년 4월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김교신의 공생애를 1927년부터 1945년까지로 볼 수 있는데, 그는 이 시기의 대부분을 교사로, 『성서조선』 주필로 살았다. 그의 공생애 기간 대부분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긴 전쟁의 와중에 있었으니, 우리 근대사에서도 가장 어둡고 야만적인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야만적인 시대를 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길인지, 어떻게 하면 신앙을 실생활에서 드러낼 수 있는지 깊이 고민했고, 그 답을 성서에서 찾기 위해 성서를 진지하게 연구했다. 예수를 따라 사는 것이 참된 삶이라는 믿음으로, 성서라는 등불 하나 들고 그 시대의 어둠을 비추었던 사람, 그래서 그 빛 주위로 신앙의 동지들 몇 사람 불러모아 서로 기대어 그 어두운 시대를 건너갔던 사람. 지금 한국 기독교는 김교신에게 길을 물어야 할 때다.
1강 조선산 기독교의 모색 (1920-1927)
청년 김교신은 1920년 도쿄 유학 중 기독교에 입문했고, 1921년부터 우치무라 간조의 강연회에 참석하면서 무교회 전도자의 길을 준비하게 된다. 1927년 7월 우치무라 강연에 참석하던 여러 동인들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하게 된다. 이 무렵 김교신과 조선인 청년들이 『성서조선』을 창간하면서 꿈꾸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2강 단독으로 서다 (1928-1931)
1930년 6월 동인제가 폐지되고 김교신이 『성서조선』 편집을 단독으로 맡게 된다. 이 무렵 김교신은 칼라일을 읽으며 이상적 인물을 구상하고 있었고, 성서연구회에서 산상수훈 연구를 강해하면서 조선을 일으켜 세울 윤리학을 모색하고 있었다. 김교신이 성서를 통해 찾고자 한 조선의 살 길은 무엇이었는가?
3강 신앙과 학문의 합금 (1932-1935)
1934년 동계성서강습회에서 김교신은 「조선지리」를, 함석헌은 「조선역사」를 강의했다. 이 두 강의는 식민지 사관을 벗어나 섭리의 관점에서 조선 지리와 역사를 논의한 것으로 조선 기독교 50년 역사에 빛나는 성취였다. 김교신은 향후 기독교는 ‘신앙과 학문의 합금’이어야 한다고 했다. 김교신이 말한 ‘신앙과 학문의 합금’은 무엇이었는가?
4강 소록도로 가리라 (1935-1937)
1935년 3월 소록도 한센인 문신활에게서 온 편지를 받고 김교신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 일 후 『성서조선』은 소록도에서 온 편지를 다수 수록했고 독자들이 이 편지에 응답함으로써 『성서조선』은 새로운 사명으로 다시 뜨거워졌다. 『성서조선』은 한센인들의 삶과 신앙을 전해주는 통로가 되었다. 소록도 통신은 <성서조선>에 무엇을 남겼는가?
5강 강대한 괴물 앞에서 (1937-1941)
1937년 김교신은 무교회가 더 이상 교회를 상대로 싸울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신사참배가 강요되고 있었고, 전쟁의 기운이 점점 더 짙어져 가고 있었다. 중일전쟁 이후 『성서조선』 간행은 더욱 어려워져 결국 1939년 신년호는 황국신민서사를 게재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실로 강대한 괴물’과 마주한 상황이 었다. 김교신은 이 환난의 시기를 어떻게 헤쳐나갔는가?
6강 부활의 봄을 노래하다 (1942-1945)
1942년 3월 『성서조선』에 「조와」와 「부활의 봄」이라는 글이 실렸는데 이 글이 빌미가 되어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김교신과 『성서조선』 관련자들은 검거되었다. 만 1년 만에 석방된 후 김교신은 일본질소비료공장 관리계장이 되어 조선인들의 삶을 향상하는 일에 헌신하다 1945년 4월 서거했다. 삶의 마지막 시기에 김교신을 이끌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